“김광석 벽화길, 내 젊은날의 한 축”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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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3-23   |  발행일 2018-03-23 제33면   |  수정 2018-03-23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미술가 손영복
20180323
미술가 손영복. 그는 조각을 베이스로 한 공공미술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2010년부터 시작된 방천시장 김광석벽화길사업 예술감독으로 일했다. 그 거리의 최고 포토존이 된 벤치에 앉아 통기타를 치는 김광석 조각물, 그리고 야외공연장 앞 소공원에 있는 전신 크기의 김광석 동상을 제작했다. 자신이 만든 김광석 모형물 옆에 앉아 통기타 포즈를 취해보고 있다.

지금 난 작품과 상품 사이에서 ‘거미’처럼 살고 있다. 둘 사이를 스파이더맨처럼 오가며 미술로 장엄한 ‘화엄(華嚴)의 세계’를 펴보이고 싶다. 누군 작품만을 얘기하고 누군 상품만을 얘기하기도 한다. 모두 틀렸다. 융복합 세상에 그건 무의미하다. 이것이 저것이 되고 저것이 이것이 되는 세상. 상품 같은 작품, 작품 같은 상품이 공존하는 세상이다. 이미 미술이 기술, 기술이 미술이 돼버렸다. 미디어아트 창시자인 백남준이 그 가능성을 실험했다. 이제 아티스트는 ‘유비쿼터스’(Ubiquitous·‘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뜻의 라틴어로, 사용자가 컴퓨터나 네트워크를 의식하지 않고 장소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환경) 세상을 봉황처럼 날아다닌다. 내 유전자의 한쪽은 네덜란드의 후기 인상파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가 장악하고 있다. 또 다른 쪽은 팝아트 창시자인 앤디 워홀이 거머쥐고 있다.

“공공·환경·설치 미술가로 불리는 직업
 캔버스로 보이는 도시의 모양·색 혁명
 방천시장 살리기…김광석 오브제 올인
 예술가·상인 동거시작 예술 프로젝트”


내 작업실은 좀 황당한 곳에 있다. 한때 대구에서 가장 음습한 북성로 한 언저리에 있다. 대구역전을 전사처럼 누볐던 ‘밤의 여인’을 지척에서 대면하면서 살아간다. 편견이 두려움을 만들고 고정관념이 낙인을 찍게 만든다. 이 언저리의 역사를 아는 이들은 여길 지나면서 다들 쫓기듯 도망가듯 지나간다. 이 거리가 비열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인간은 원래 그런 것 아닌가. 난 그게 우습다. 예술이란 이유 없음 속에서 이유를 창조해내야 한다.

내 작업실은 방치된 공사장 같다. 볕은 바닥나고 없다. 체온으로 실내 공기를 덥혀줘야 한다. 항상 축축하고 냉랭하다. 여름 같은 대낮, 하지만 내 작업실에 들어오면 석빙고처럼 찬 기운이 감돈다. 화장실도 없는 비어있던 창고를 다시 그렸다. 화장실조차 없던 공간이었다. 난 입구에 문패랍시고 몇 자 끄적거렸다. ‘복아트 팩토리(BOKART FACTORY)’. ‘복’이란 내 이름의 마지막 자다.

‘아트 팩토리’. 그것의 원전은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코카콜라와 마릴린 먼로를 그려낸 앤디 워홀이다. 1961년 그는 33세의 나이에 캔이나 달러 지폐를 모티브로 해 팝아트를 탄생시킨다. ‘대통령도 나와 같은 코카콜라를 마신다’란 자극적 어록으로 한 시절을 풍미한 그였다. 64년 뉴욕 맨해튼에 ‘더 팩토리(The Factory)’라는 스튜디오를 짓는다. 그는 자신의 스튜디오를 ‘공장’이라 했다. 그는 여기서 예술 노동자를 고용해 실크 스크린 프로세스 프린트, 구두, 영화 등의 작품을 제작한다. ‘예술이란 대중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차원에서 작품을 대량 생산해서 싸게 팔았다. 하지만 사후 그의 작품은 슈퍼스타 대접을 받는다.

누군 날 보고 공공미술가, 환경미술가, 설치미술가 등으로 부른다. 일반 화가와는 질감이 다른 건 사실이다. 난 사회와 소통하고 싶다. 한 도시가 거대한 캔버스로 보인다. 도시의 모양과 색을 혁명하고 싶은 것이다.

공공미술은 다분히 혁신적이었다. 60년대 말 미국 정부에서 시작한 두 가지 제도가 공공미술의 기원이 된다. ‘미술을 위한 일정 지분 투자 프로그램’과 관련이 있다. 이는 공공건물을 신축할 때 건설 예산액의 일정 지분(대개 1%)을 예치해 미술품을 위해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덕분에 많은 미술가들이 작업실을 떠나 작업실 규모보다 큰 건축적 규모를 요구하는 ‘대지미술’과 그 밖의 다른 환경미술 형태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복잡한 프로젝트의 완수를 위해 공동작업을 기꺼이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작업실 제작의 전 과정을 혼자 관리하려는 태도를 버리게 되었다.

2000년 개관한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미술관은 81년 문을 닫은 ‘뱅크사이드 발전소’를 개조해 만들었다. 동시다발적으로 베이징의 소호로 불리는 ‘다산쯔(大山子)’와 ‘지우창(酒廠)’도 공공미술의 꽃으로 내게 엄청 영향을 준다. ‘다산쯔 798예술구’는 군수공장의 폐허 위에 조성됐고 ‘지우창예술구’는 예전 술공장에서 피어났다.

한때 난 죽었기 때문에 오히려 전설이 될 수 있었던 가수 김광석을 오브제로 한 예술거리사업에 올인했다. 그렇다. 중구 방천시장을 부활시킨 ‘김광석벽화길’이다. 내 젊음의 한 축은 그것과 맞물려 돌아갔다. 그 길은 예술가와 시장 상인, 건물주, 공무원, 심지어 건축과 교수까지 한 자리에 모일 수 있게 했다. 예전에는 각자 놀았다. 그 길 때문에 대구문화판의 지평이 훨씬 넓어진 것도 사실이다. 방천시장엔 김광석 스토리도 없고 관광객도 전무했다. 그때까지 전주 한옥마을 못지않은 도심투어 핫플레이스로 급부상할 것을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다. 2010년 어느 날, 현재 전방위독립문화예술단체 ‘인디 053’을 이끄는 이창원 대표와 낮술을 마셨다. 거기서 김광석 아이디어가 최초로 발화된다. ☞ W2면에 계속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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