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의 선율 따라…연간 100만명 찾는 350m ‘마법의 길’

대구 | 박병률 기자

대구

대중문화 콘텐츠는 힘이 세다. 한류 문화 콘텐츠를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은 서울이다. 서울은 한류 콘텐츠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1번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이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거대 도시여서 되레 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한류 문화 콘텐츠를 이용해 돌파구를 찾는 두 지방도시를 찾아가봤다.

귀에 익숙한 노래가 기타 선율을 타고 잔잔히 들려왔다. 한글날이던 지난 9일, 골목길이 내려다보이는 2층 카페는 여유로웠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그대의 머리결 같은 나무 아래로.”

거리에서 이름 모를 연주자가 기타를 치며 부르는 김광석 노래에는 10월의 정취가 듬뿍 담겼다. 연인으로 보이는 커플과 친구로 보이는 무리들이 테이블에 앉아 창턱을 넘어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다 까르르 웃다 수다를 떨다 다시 흥얼거린다. 볕이 좋은 창가 구석에서 책을 읽던 김현희씨(32·대구 수성구)는 “이런 분위기가 좋아 휴일 아침에 종종 혼자 온다”며 “지방은 물론이고 서울에서도 느끼기 힘든 정취”라고 말했다.

뮤지션 한 명이 연간 100만명을 끌어들이는 마법 같은 골목길이 있다. 대구 중구 방천시장 인근에 있는 ‘김광석 다시그리기길’(김광석길)이다. 김광석길은 한류 열풍의 기반이 된 대중문화 콘텐츠를 지방에 가장 잘 접목시킨 성공사례로 꼽힌다.

기타를 치는 모습인 김광석 동상을 지나면 길이 시작된다. 벽면에는 ‘서른 즈음에’ ‘거리에서’ ‘이등병의 편지’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 등 음유시인 김광석의 노래를 주제로 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사진을 찍으며 걷다 골목 방송국을 지나면 노천 공연장이 나온다. 50여m 더 걸어들어가 오르막길 끝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김광석의 흔적을 모은 김광석스토리하우스를 만나게 된다. 고작 350m에 불과한 이 길을 찾은 사람은 올 들어 지난달까지 130만명이 넘는다. 연말까지 170만명가량이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방천시장은 1960년대 싸전과 떡전으로 유명해졌다. 한때 점포수가 1000개가 넘었다. 하지만 도심이 공동화되고 대형마트, 백화점이 주변에 들어서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방천시장 살리기는 대구 중구청의 고민거리였다. 때마침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화를 통해 전통시장을 활성화시키자는 취지로 ‘문전성시사업’을 시행했다. 중구청은 방천시장에 스토리를 입히기로 했다. 시장 상인과 지역 예술가들이 머리를 맞댔고 그 결과물이 가수 김광석이었다. 김광석은 대구 중구 대봉동에서 태어나 5살까지 방천시장 인근에서 살았다. 대중음악인의 이름을 내건 전국 유일의 길인 김광석길은 이렇게 탄생했다.

2010년 11월 90m 구간을 처음 만들었고 이후 계속 확장해 지금은 350m까지 늘어났다. 김광석의 유족이 유품을 기증하면서 지난해에는 김광석스토리하우스도 개관했다. 예전에는 쓰레기더미가 쌓인 어둡고 슬럼화된 공간이었다.

방천시장 인근에 있는 ‘김광석길’
쇠락하던 시장 골목 살리려 기획
공방·창작실·갤러리 들어서고
마을기업·협동조합도 만들어져

시시때때로 축제와 공연 열리고
옛 골목의 추억 반추하기 좋아
입소문 타고 해마다 방문객 늘어

큰돈 들인 건물이나 행사 없이
콘텐츠·편의시설 매년 보강해
지자체들이 주목하는 성공 사례

사람들이 찾아들면서 거리에 활기가 돌았다. 공방, 창작실, 갤러리가 생겼고 예쁜 카페가 들어왔다. 방천시장을 기반으로 마을기업, 사회적기업, 협동조합도 만들어졌다. 김광석길 관광안내소에서 만난 홍수자 골목문화해설사는 “징검다리 휴일이 있던 지난 주말에는 어깨가 부딪쳐 다니기 힘들 정도로 사람이 많이 왔다”며 “다른 관광지와 달리 여기는 비 오는 날에도 김광석의 음악을 느끼기 위해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은 것은 아니었다. 2013년 김광석길을 찾은 사람은 4만4000명에 그쳤다. 하지만 이듬해 47만명을 넘더니 2015년에는 84만명이 찾았다. 방문객 증가는 계속돼 2016년에는 연간 100만명이 찾는 명소가 됐다. “가보니 괜찮더라”는 입소문의 힘이었다.

[창간 기획-콘텐츠가 미래다]김광석의 선율 따라…연간 100만명 찾는 350m ‘마법의 길’

김광석길에는 음악이 넘쳐흐른다. 시시때때로 축제와 공연이 열린다. 골목마다 버스커들이 공연을 펼친다. 여성 두 명이 2m 거리에 앉아 턱을 괸 채 버스킹을 즐기고 있다. 음악이 없는 곳을 찾기 힘들다. 대구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음악창의도시다. ‘실내버스킹’도 있다. 연극배우 이재선씨는 20분짜리 단편연극인 <이등병의 편지>를 토·일요일 두 차례씩 열고 있다. 공연비는 ‘자유지불’이다.

길 끝에는 2층짜리 김광석스토리하우스가 있다. 김광석이 공연 때 사용했던 하모니카, 악보, 콘서트표, 김광석을 기념해 한정판으로 제작한 ‘마틴 기타’ 등 100여점의 소품을 전시했다. 그의 거실과 작업실도 재현했다. 생전 인터뷰와 그의 수첩 속 메모도 엿볼 수 있다. 지난해 6월 개관 이후 9만명이 찾았다. 김광석스토리하우스 맞은편에 있는 김광석소극장에서는 대구 청년뮤지션들의 공연이 진행되고 있다. 김인근 김광석스토리하우스 관장은 “서울·경기 방문객이 가장 많고 호남, 제주에서도 많이 온다”며 “외국인 중에서는 대만 방문객이 많은데 단체관광객도 있지만 한류가 널리 알려지다 보니 김광석을 알고 찾아오는 분들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인디 레이블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대만 음반회사 대표와 가수들이 대구 치맥페스티벌에 참가했다가 물어물어 김광석길을 찾았다고 한다. 김광석스토리하우스를 한 시간 넘게 둘러본 그들은 김광석 음반을 한 아름 사서 돌아갔다. 김광석 노래 중 상당수가 영화 OST로 사용되거나 리메이크돼 외국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다.

김광석길은 지방이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콘텐츠라는 평가도 있다. 옛 골목이 있어 추억을 반추하기 좋은 데다 김광석에만 집중하기에도 대구가 좋았다. 김광석은 대구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서울 종로구 창신동으로 이사했다. 경희중에서 바이올린, 플루트 등을 다루고 악보 보는 법을 배웠고, 대광고에서 합창부로 활동하면서 음악적 감수성을 키웠다. 김광석이라는 이름을 알린 곳은 대학로 소극장 학전블루였다. 대구보다 서울에 단연 그의 흔적이 많다. 하지만 김광석이라는 콘텐츠를 껴안기에 서울이라는 도시는 너무 컸다. 창신동에는 한국 건축의 대가 박수근의 작업실과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의 생가가 있다. 대학로도 수많은 뮤지션들이 거쳐갔다. 이래서는 김광석만 띄우기 어렵다. 김인근 관장은 “서울은 땅값이 비싸 단일 예술인을 위한 기념사업을 추진하기에는 부담이 있을 수 있다”며 “예술인들이 주로 활동한 곳보다 생가가 더 주목받는다는 것도 대구의 김광석길이 성공한 이유”라고 말했다.

김광석길은 많은 지자체들이 주목하고 있다. 문화 콘텐츠를 잘 활용해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성공한 사례가 됐기 때문이다. 김광석길은 수천억원이 투입된 큰 건물이나 행사 없이 전국적인 명소가 됐다. 소액의 예산을 들여 길을 조금씩 바꿔 나갔고, 성과를 보며 추가예산을 투입하는 방식으로 김광석길을 확장했다. 주차장이 부족하다는 지적에 주차장을 늘렸고, 공연장소가 부족하다는 소리에 야외공연장을 만들었다. 김광석에 대한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비판에는 김광석스토리하우스를 설립했다. 김광석스토리하우스는 원래 대봉동경로당으로 중구청 소유다. 이를 리모델링해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운영은 김광석행복나눔재단에 맡겼다.

김광석길은 전체를 관리하는 협의회나 사무국이 없다. 상인과 예술인, 거주민들이 각기 단체를 만들어 별도로 활동한다. 대구 중구청에서도 관리주체가 나뉜다. 김광석길의 벽화는 관광자원과, 공연장은 문화개발과가 담당한다. 협의할 일이 있으면 전체가 머리를 맞대고 결과를 도출해낸다.

대구 중구청 관계자는 “김광석길은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라며 “매년 예산을 투입, 벽화와 조형물을 추가해 콘텐츠를 보강하고 편의시설을 조금씩 확대해 방문객들이 365일 찾을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 | 박병률 기자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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